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 왕국 (문단 편집) ==== 포르투갈 왕실의 귀환과 [[브라질]]의 이탈 ==== 1814년 프랑스군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최종적으로 축출되면서 전쟁이 종식된 후, 포르투갈인들은 주앙에게 조속히 귀국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불안정하고 이웃의 [[스페인]]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포르투갈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브라질에서 그대로 통치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815년 12월 16일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을 창설하고 히우지자네이루를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1816년 3월 20일 정신병에 시달리던 마리아 1세가 사망하면서, 주앙 왕자는 비로소 '''[[주앙 6세]]'''로 등극했다. 대관식은 1818년 2월 6일 히우지자네이루에서 성대한 축제와 함께 거행되었다. 한편, [[카를로타 호아키나|카를로타 왕비]]는 남미 대륙의 스페인인들과 히우 지 플라타 지역(현재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민족주의자들과 손잡고 남편을 퇴위시킨 뒤 자신이 남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들의 새로운 여왕으로 등극하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도중에 정보가 새는 바람에 실패했고, 주앙 6세는 그녀를 별궁에 유폐하고 철저히 감시하게 했다. 이후 브라질의 지배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1817년 몬테비데오를 공략하고 1821년 시스플라티나 주를 합병했다. 또한 1817년 장남 페드루의 아내로 오스트리아 제국 초대 황제 [[프란츠 2세|프란츠 1세]]의 딸인 [[마리아 레오폴디네]]를 결혼시킴으로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동맹을 맺었다. 국왕이 포르투갈에 좀처럼 돌아오지 않자, 포르투갈인들은 각지에서 소요를 일으키며 왕을 압박했으며 자유주의자들은 영국식 의회를 포르투갈에도 도입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브라질에서도 자유주의자들의 선동이 이어졌다. 1817년 레시페에서 시작된 페르남부쿠 반란이 일어났다. 도밍구스 주제 마르틴스, 안토니우 드 안드라다, 프레이 카네카 등이 이끄는 반란군은 공화 정부를 페르남부쿠에 수립하고 미국, 아르헨티나,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몇 달 만에 토벌되었다. 1820년 10월 17일 포르투에서 시작된 반란이 여러 도시들에 빠르게 확산되어 마침내 리스본에서 민중 봉기가 발발했다. 반란을 주동한 이들은 자신들이 "자유 혁명"을 일으켰다고 자축하며 포르투갈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왕실이 포르투갈로 즉각 돌아와야 하며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브라질과의 무역에서 포르투갈의 독점권을 회복하여 브라질을 식민지 상태로 되돌리고 공식적으로 "브라질 왕국"이 아닌 "브라질 공국"으로 격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왕이 돌아올 때까지 잠정적인 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제헌 의회 선거를 실시해 변호사, 교수 출신의 의원들이 선출되었다. 1821년 1월 30일, 새 의원들로 구성된 코르테스가 리스본에서 소집된 뒤 군주의 즉각적인 귀환을 요구했다. 이 소식이 브라질에 전해지자, 이번에는 브라질인들이 반발했다. 그들은 포르투갈에 예속된 식민지인 취급을 받다가 주앙 6세의 망명 이래로 '브라질 왕국의 일등 백성'으로 인정받았는데, 이제와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보고, 주앙 6세의 귀국을 강력히 반대했다. 주앙 6세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페드루를 포르투갈에 보내는 방안을 모색했지만, [[자유주의]] 성향의 서적을 탐독하여 열렬한 자유주의자가 된 아들이 포르투갈에 갔다가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페드루의 출발을 가능한 한 연기했다. 그러던 1821년 2월 26일, 포르투갈 병사들이 히우지자네이루에서 "새 내각을 임명하고 포르투갈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하라"고 외치며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4월 21일 히우지자네이루에 모인 자유주의자들이 자체적으로 선거를 벌여 의원들을 선출해 코르테스를 조직했다. 주앙 6세는 이 사태를 어찌 수습해야 할 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다가 페드루 왕자로부터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설득을 받아들여 코르테스에 선출된 의원들을 받아들였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주앙 6세는 결국 포르투갈로 귀환하기로 했다. 그는 아들 페드루를 브라질의 섭정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1821년 4월 26일에 왕실 식구들 및 귀족들과 함께 리스본으로 향했다. 전승에 따르면, 주앙은 포르투갈로 떠나기 전에 페드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페드루, 브라질은 곧 포르투갈에게서 분리되겠구나!" 7월 3일 리스본 항구에 입항한 주앙 6세는 자유주의자들의 영접을 받은 뒤 그들이 정한 헌법을 승인했다. 1822년 10월 1일부터 헌법이 효력을 발휘되면서, 포르투갈 국왕은 상당한 특권을 상실했다. 카를로타 왕비는 헌법을 준수하겠다는 맹세를 수행하기를 거부했다가 왕비의 칭호를 박탈당하고 켈루스 궁전에 유페되었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아들 페드루가 브라질 자유주의자들의 추대를 받아 1822년 9월 7일 [[브라질 제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브라질)|페드루 1세]]로 등극했다. 주앙 6세는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인지 아들이 브라질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1823년 6월 27일, 카를로타 왕비의 부추김을 받은 미겔 왕자가 절대군주제를 회복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내심 자유주의자들 때문에 권력이 제한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주앙 6세는 즉시 호응해 제복을 입고 공개석상에서 아들 옆에 모습을 드러냈고, 병사들은 왕과 왕자를 향해 손뼉을 쳤다. 이후 코르테스를 무력으로 압박한 끝에 해산시키고 헌법을 대폭 수정해 절대군주 체제를 복원시켰다. 이후 카를로타의 권리가 회복되었고, 1823년 6월 5일 자유 헌법 수호를 위해 들고 일어난 시위대를 진압하고 일부 자유주의자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카를로타와 미겔은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1824년 4월 29일, 미겔은 리스본에서 수비대를 이끌고 주앙 6세를 체포한 뒤 왕을 살해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구실로 파코 다 뱀포스타에 감금했다. 이후 여러 정적을 체포해 반역 혐의를 적용해 처형할 준비를 하는 한편, 주앙 6세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그러다 외국 대사들이 궁궐에 들어서서 왕을 뵙기를 청하자, 반란군은 외국과 갈등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주앙 6세에게 다소의 자유를 줬다. 주앙 6세는 영국 대사의 권유를 따라 5월 9일 카시야스로 여행가는 척 했다가 리스본 항구에 정박한 영국 군함 윈저 호에 탑승했다. 이후 영국군의 도움에 힘입어 미겔을 체포한 뒤 추방했고, 뱀포스타에 돌아온 뒤 반란군 전원을 사면하는 대가로 다시 한 번 충성 서약을 받았다. 카를로타는 다시 반란을 준비했지만 얼마 안가 발각되어 켈루스 궁전에 재차 감금되었다. 1824년 6월 5일 지난날 추방되었던 자유주의자들을 사면하고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새 헌법을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많은 대신들은 포르투갈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브라질의 반란을 진압할 원정군을 파견하자고 제안했지만, 주앙 6세는 포르투갈이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거부하고 협상을 택했다. 1825년 8월 29일, 포르투갈과 브라질은 영국의 중재 하에 양자를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주앙 6세는 투옥된 모든 브라질인을 석방하고 양국 간의 무역을 승인하고, 페드루 1세가 브라질의 황제를 칭하는 것을 받아들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